히라이즈미 관광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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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이즈미의 세기

미치노쿠’ 자립에의 서장

일본의 지도를 펼쳐 보면, 후쿠시마현의 남쪽끝 도치키현과의 경계에 시라카와시가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시라카와 관문 이북을 무쓰노쿠니라고 했으며, 도산도(東山道)의 더 안쪽이라는 의미로 ‘미치노쿠’라고 불려왔었습니다. JR 시각표를 참고하면 아오모리까지의 거리가 약 550km, 아오모리에서 도쿄・모지를 경유하여 가고시마까지가 2240km입니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가 포함되어 있지 않던 시대, 일본 ‘66개국’의 거리상으로 봐서 시라카와 이북은 약 1/4에 상당했던 것입니다.

미치노쿠(무쓰, 오슈)는 대지가 넓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일한 금산지였습니다. 또한 오슈라고 하면 누카노베의 준마가 유명합니다. 조정 귀족 문화에 있어서 필수부가결한 일본 종이와 옻도 생산되었고, 북방과의 교역를 통해 특산물도 수입되었습니다. 미치노쿠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심은 관물의 납입, 공물로 바치는 말과 금이었던 것입니다.

도읍지 사람들에게는 가즈사(현재 수도권 치바)도 동쪽 도로 끝보다도 더 먼 곳이었습니다. 더더욱 미지의 땅이었던 미치노쿠는 그리하여 외부 사회와 같이 미개인 취급을 당했으며, 공격당해 정벌되어 왔던 것입니다.

히라이즈미는 그 미치노쿠(무쓰)의 거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고로모가와 강이 동쪽으로 흘러 기타카미가와 강과 합류합니다. 이 고로모가와노 세키 관문 이북이 에미시(고대 도호쿠지방의 토착민)의 땅으로 ‘오쿠 로쿠군(奥六郡)’이라 하여, 중앙과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11세기 고로모가와 이북의 에미시를 지배했던 것이 아베씨였습니다.

1053년, 미치노쿠(무쓰) 장관으로 부임한 미나모토씨의 통솔자 요리요시는 북방의 방위를 위해 설치한 관청의 장군도 겸하며 아베씨를 견제했습니다. 젠쿠넨노 야쿠(예전에는 주니넨 갓센(12년전투)이라고 했다. 1051~62) 전투가 일어났을 때, 지방장관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자, 아베노 요리토키는 고로모가와 관문을 닫아 저항했으며, 오슈는 조정의 추세를 위구하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방장관을 보좌하는 좌청관인 중에서 아베씨 편이 되었던 자가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이고, 그의 아들이 오슈 후지와라씨의 1대 기요히라입니다.

불교 도읍지 히라이즈미의 조영

젠쿠넨노 야쿠 전투의 결과, 수비태세로 일관했던 요리요시 지방장관을 도왔던 데와의 기요하라씨가 아베씨의 영지도 지배하게 됩니다. 기요히라의 모친이 기요하라 가문에 재가함에 따라 7살의 기요히라는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었지만, 패한 장군의 아들로써 의붓아버지와 형제 속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기요히라가 28세가 되었을 때, 기요하라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새로 부임한 미치노쿠(무쓰)의 장관 요시이에가 무력으로 개입했던 것이 고산넨노 야쿠 전투입니다.

조정의 허락도 없이 전투에 개입한 요시이에는 포상을 하사받기는커녕 지방장관을 해임당해 미치노쿠(무쓰)를 떠나게 됩니다. 아베씨의 혈통을 이어받은 기요하라 가문의 일원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기요히라입니다. 이리하여 공교롭게도 그가 오우를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요히라는 본거지를 도요다노 다치(에사시시)에서 히라이즈미로 옮기게 되는데 이것은 오쿠 로쿠군의 핵심에서 오우세계의 핵심으로 기요히라의 의식이 전환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율령제도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불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기요히라라는 인물상이 보이게 됩니다.

우선 시라카와세키 관문에서 북쪽으로 쓰가루 소토가하마까지 106m의 거리마다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여 공양하는 탑인 가사소토바(솔도파)를 세워 그겉에 금색의 아미타여래를 그려넣었다고 합니다. 왕래하는 여행자들은 아미타불의 모습을 접하고나서 주손지 절에 다다르게 됩니다. 산위에는 석가・다보상이 있는 다보탑을 배치하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따른 것입니다. 다이초주인에는 아미타구품인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누구나가 평등하게 구원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기원의 구상입니다. 샤카도(釈迦堂)에는 100여체의 금색 석가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요히라는 미치노쿠(무쓰)・데와의 각지에 사당을 건립했었습니다.

‘전 오우를 불교 국토로’ 란 대지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불교 국토를 의미합니다. 헛된 전쟁을 통해 희생된 ‘미치노쿠’ 사람들의 진혼이며, 오우 자립의 정치이념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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